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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시간이 전쟁이라면: 미각과 후각의 통합 문제

by 개굴09 2025. 6. 23.

“밥 먹자”는 말을 아이가 제일 싫어하고 특정한 음식은 시도조차 안하려고 하기도 하고 특정한 음식만을 먹으려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단순한 '편식'일까요? 이러한 행동이 너무 뚜렷하게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원인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은 편식의 근본 원인을 감각통합, 특히 미각과 후각의 통합 문제에서 찾고 있습니다.

감각통합은 여러 감각 자극을 뇌가 정리하고 조직하여 적절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뇌의 기능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단순히 ‘맛’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냄새를 맡고, 색과 모양을 보고, 질감을 느끼며, 그것을 씹고 삼키는 일련의 감각 경험을 동시에 처리합니다. 그런데 이 중 하나라도 과민하거나 둔감하면, 음식은 아이에게 고통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사례

  • 다섯 살 민준이는 매 끼니마다 단 두세 가지 음식 외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엄마는 민준이가 “고집이 세서”, “입이 짧아서”라고 생각했지만, 감각통합 평가 결과 민준이는 미각과 후각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특히 익은 채소나 고기류에서 나는 냄새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고, 음식의 질감이 조금만 끈적이거나 미끄러워도 바로 뱉어버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 이런 경우, 강제로 음식을 먹이거나 반복적으로 권유하는 접근은 오히려 아이의 불안을 강화시킵니다. 뇌는 이미 특정 감각 자극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식사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감각적 불편함이 계속 쌓여 ‘거부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즉, 아이는 일부러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피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감각통합의 관점에서 보면, 편식은 단순한 식습관 문제가 아니라 뇌의 감각처리 방식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에게는 음식 자체에 적응하는 시간과, 감각적 자극을 단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놀이 기반의 감각 활동’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민준이는 놀이치료실에서 음식 재료를 만지는 촉각놀이, 향을 맡아보는 후각 자극 활동, 가상 요리놀이 등을 통해 점차 감각적인 수용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 몇 주 뒤, 민준이는 이전에 절대 먹지 않던 삶은 달걀과 브로콜리를 자발적으로 시도해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먹였다’가 아니라 ‘스스로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뇌가 해당 감각을 더 이상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편식이라는 행동 뒤에는 종종 미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의 통합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아이가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를 단순히 버릇이나 기호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뇌가 감각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를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각통합 기반의 식사 접근법: 억지보다는 ‘적응’

편식이 감각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접근 방식도 그에 맞춰 조정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억지로 먹이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익숙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는 감각 회피 행동을 줄이고, 뇌가 새로운 자극을 안전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첫 단계는 ‘먹이지 않아도 괜찮은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식탁 위에 아이가 거부하는 음식을 단지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브로콜리를 억지로 먹이기보다는 그 옆에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놔두고, 향을 맡아보게 하거나 손으로 만져보게 하는 수준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렇게 시각·후각·촉각 순서로 감각 자극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점차 그 음식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갑니다.

집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감각놀이 전략

1. 요리 놀이 함께하기: 실제 식사 전에 식재료를 만지고, 자르고, 섞어보는 활동은 감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후각과 촉각이 발달하는 시기의 유아에게 효과적입니다.

2. 향기 놀이: 다양한 식재료의 향을 맡아보는 놀이를 통해 후각에 대한 민감도를 점진적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건 어떤 냄새일까?”라고 질문하면서 놀이처럼 접근하세요. 부담 없이 향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적응이 시작됩니다.

3. 감각 거부 음식의 '놀이화': 예를 들어, 토마토를 얇게 썰어 얼굴 스티커처럼 붙여본다거나, 오이를 도장처럼 찍어보는 등 음식에 대한 ‘접촉’ 경험을 게임으로 만들어보세요. 감각 통합의 첫걸음은 '놀이'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의 말과 태도

식사 시간에 반복되는 말, 억양, 표정은 아이에게 매우 강력한 감각 자극입니다. “왜 안 먹어?”, “이거 먹어야지!”라는 재촉보다, “여기 있네~ 그냥 냄새만 맡아보자” 혹은 “넌 어떤 냄새가 좋아?”와 같은 탐색 중심의 언어가 아이의 방어 반응을 낮춰줍니다.

또한, 아이가 음식을 시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각통합 치료에서도 ‘시도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공간’은 감각 적응의 핵심 요소로 간주됩니다. 식사는 위협이 아닌, 탐험이 되어야 아이의 뇌는 새로운 감각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편식, 감각의 언어로 다시 보기

편식이 너무 심하다며 매일 아이와의 식사시간을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가정이 있다면 제공해 드린 정보를 바탕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식은 단순히 ‘못 먹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감각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미각, 후각, 촉각, 시각—이 모든 감각이 통합되어야 음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편식 행동을 훈육이나 습관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뇌의 감각처리 방식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감각통합적 접근은 느리지만 아이에게 안전하고 존중받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꾸준한 감각 놀이와 정서적 지지를 통해, 아이는 결국 자신의 속도대로 새로운 음식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갑니다. “언젠가는 먹을 거야”라는 믿음보다, “지금은 이 냄새에 익숙해지는 중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부모님이 감각통합을 이해한다면 아이의 성장과정을 이해할 수 있고 아이의 속도에 맞는 방식에 맞는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